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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문계간지 신생  2022 봄 출처

재일조선인

조선학교를 이야기하자면 우선 재일조선인에 관한 설명부터 시작함이 옳을 것 같다. 일제 강점기(일본의 식민지 시절)에 자의로 또는 징용이나 징병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동포들이 약 200만 명쯤이었다. 당시의 한반도 인구가 대략 2,000만 명 정도였다니 1할 정도의 엄청난 동포들이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이들의 출신지를 보면 경상도가 압도적이었고 제주도 출신이 그 다음을 이었다. 이는 당시에 일본을 내왕하는 뱃길이 ‘부산-시모노세끼’, ‘부산-오사카’와 ‘제주-오사카’였던 것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하자 동포들은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눈물로 건넜던 현해탄을 다시 건너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돌아오지 못한 동포도 많았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좌·우 대립이 심했고 고국에 생활기반이 없는 동포들은 귀국이 불안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귀국하는 재일조선인에게 1000엔만 소지할 것을 강제했으니, 생활기반과 재산이 일본에 있는 동포들은 귀국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조만간 한반도가 안정되고 일본의 제한 조치가 바뀔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눌러앉았지만, 이후 한국전쟁 등으로 불안요소가 겹치면서 어쩔 수 없이 오랜 세월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 땅에 남게 된 이들의 수가 약 60만 명이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재일조선인(재일동포)의 시작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을 1세, 그들의 자녀를 2세라 하는데 지금은 4세, 5세의 젊은이들이 일본에서 살고 있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갈 거야

해방 이후 당장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재일조선인들이 마음 모아 시작한 것은 일본서 태어난 자식들이 우리말 우리글을 모르면 조국에서의 삶이 어려울 것이니 그들의 아이들에게 우리말 우리글 우리문화를 가르쳐야 한다고 국어강습소를 세운 일이었다. 해방 직후의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동포들의 피깜으로 각지에 국어강습소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미군정과 일본 정부는 일본 내에서의 민족교육을 인정하지 않고 학교 폐쇄령을 내렸다. 학교를 폐쇄하고 학생들을 모두 일본 학교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세운 학교인데 문을 닫으라는 것이냐며 동포들은 거세게 항의하였고, 미군정과 일본은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 해산에 나섰다. 수많은 동포들이 연행되었고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끌려 나오고 급기야 16살 김태일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동포들은  이를 ‘4.24교육투쟁’이라 부르며 아직까지도 기념하고 있다.
동포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찰을 앞세운 물리력을 이기지 못하여 1949년 결국 모든 국어강습소가 폐쇄되었다. 동포들로서는 피눈물 나는 일이었으리라.
미군정이 물러가고 1955년부터 다시 조선학교를 일으켜 세웠다. 당시 이미 분단 상태였던 조국에서 북은 재일조선인을 ‘해외공민’이라 부르며 북도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조선학교에 교육지원금을 보내주었다. 이 교육지원금이 학교를 다시 세우는데 엄청나게 큰 힘이 되었으며 이 지원금은 지금까지도 큰 액수는 아니지만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반면 재일조선인 대부분의 고향이 있는 한국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흔히 얘기하는 ‘기민정책’으로 나 몰라라 했다.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어려움 속의 동포들을 내팽개친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이다. 아프게 새겨야 할 부분이다. 
이런 남과 북의 확연히 다른 태도가 오랫동안 조선학교 교실에 북의 지도자 사진을 걸게 했고 북을 ‘조국’이라고 부르게 한 것이라 짐작한다.
학교를 다시 세우며 동포들은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어’라는 마음으로 흙 한 삽 한 삽씩을 나르고 벽돌 한 장 한 장씩을 쌓아 학교를 만들었다. 참으로 동포들의 피땀으로 학교를 다시 일으킨 것이다. 당시 조선학교 고급부(고등학교)에 다녔던 2세 어르신 한 분의 말씀 “학교 가면 공부는 조금 하고, 늘 공사했어요. 돌 나르고 땅 파고. 아주 힘들었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어요. 우리학교를 만드는 일이니까”
이렇게 모든 동포들이 힘을 합쳐 만든 학교이다 보니, 학교는 단지 아이들이 공부하는 공간을 넘어 재일조선인들의 삶의 구심점이었다. 학교를 동포들이 어떻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어린 학생(초급부 5학년)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

어머니와 함께 한 놀이
종이쪽지로 질문하기
<만약 돈을 많이 가지게 된다면?>
어머니는 뭐라고 쓰셨을까?
예쁜 옷?
가족여행?
큰 우리집?
슬금슬금 종이쪽지 펼쳐봤어요

아!!
그래, 비가 많이 내린 바자회 날에도
차가운 바닥에 앉아 판매하고 계셨지
낡은 교사 꽃학교 되라고
꽃밭 가꾸기 열심히 하셨지
제일 좋은 모든 것 학생들에게
언제나 우리들이 먼저였지
그런 어머니가 주신 대답
그것은
<학교에 다 준다>

어머니!
어머니의 넓고 따뜻한 품에
꼭 안기었어요
나는 그런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심미나(지바조선초중급학교), 「종이쪽지엔」

이렇게 일으킨 조선학교가 현재 조선대학교를 포함해서 64개교 있다. 초급부와 중급부가 함께 있는 경우도 있고 중급부와 고급부가 함께 있는 경우도 있는데, 10개의 고급부를 중심으로 중급부와 초급부가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지금 약 8,0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일인은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일인을 위하여’

조선학교를 교문을 들어서면 눈에 보이는 교사(校舍)는 오랜 세월을 지나왔음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낡아 마음 아프지만, 교정에서 만나는 학생 모두의 반가운 인사로 금방 마음이 갠다. 유치부 꼬마들조차도 누군지도 모르는 방문자에게 “반갑습니다!”한다. 그 표정과 밝은 목소리만으로도 뭉클해진다.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현관에 들어서면 ‘일 인은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일 인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만난다. 학교 선생님들이 자랑삼아 “우리학교는 왕따가 없는 학교입니다”라고 하는데 학교를 둘러보다 그늘진 아이 하나 없어 보여 쉬이 고개 끄덕여진다. 게다가 학생 수가 많지 않으니(한 학년이 10명 이내인 학년도 있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관계도 우리 기억 속의 스승과 제자 관계를 훌쩍 넘어선 느낌이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진보교육감의 등장 이후 나타난 혁신학교(다행복학교)와 같은 분위기를 이들은 오랜 세월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학교도 성적 우수자를 게시판에 붙여두기도 하지만 친구들 끼리 서로 도우며 공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학교가 멀어 1시간 넘게 통학하는 학생도 있고 아예 어린 나이에도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수업은 우리말과 우리글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조선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모두 우리말을 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초급부 저학년인 경우 일본말로 수업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초급부 고학년부터는 거의 우리말로 수업을 한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목은 우리가 배우는 과목과 거의 비슷하다. 조선학교 교사들이 모여서 자체 제작한 교과서로 공부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하게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우리말 교육이다.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우리말 쓰기 운동을 열심히 벌이고 있는데 복도에는 우리말 공부에 도움되는 게시물들이 잔뜩 붙어 있다.
우리말만큼이나 열심히 하는 활동으로 ‘소조활동’이 있다. 우리로 치자면 동아리 활동쯤 되겠는데, 매일 방과 후 2시간씩, 토요일엔 수업 없이 4시간을 소조활동을 한다. 예술소조(무용, 취주악, 민족악기 등)와 운동소조(축구, 럭비, 권투 등)로 나뉘어 활동하는데 많은 시간 소조활동을 하다 보니 수준도 상당하고 소조에서 같이 활동한 선후배 사이의 끈끈함은 졸업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발표회를 가져, 무대에 서는 것에도 아주 익숙하다.

조선적, 한국적

1945년 해방 이전에는 재일동포들은 모두 일본 국적이었으나, 해방 이후 1947년 외국인등록령이 공포되었을 때 일본국적을 가진 재일동포들을 ‘외국인’으로 규정되면서 국적란에 ‘조선’이라 표기하였다. 이미 사라진 ‘조선’을 국적으로 기록했으니 무국적자로 처리한 셈이다.
1965년 한일조약(한일국교정상화)을 계기로 한국적을 취득한 사람에 한해서 ‘협정영주권’을 주면서 재일동포사회에서 한국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조선학교에서는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재일동포 자녀이면 국적이 어디든 상관없이 누구나 학교에 다닐 수 있다. 현재 학생들 중 약 60%는 한국국적이고, 10% 정도가 일본 국적, 약 30%가 조선적이다.
‘조선적’을 가진 사람들은 해외여행에 상당한 불편을 받는다. 여행할 때마다 증명서를 받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직도 조선적을 유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국적을 바꾼다는 것은 내 조국이 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라 나는 바꾸지 않겠다”면서 불편을 감수하고도 무국적(조선적)으로 지내고 있다.

“재일조선인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오”

비록 해방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36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했던 일본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처럼 이유없이 풀죽어 지내기도 하고 일상에서 갖은 멸시도 있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학교 가는 평일에는 김치를 못 먹었어요. 주말에만 김치를 먹었지. 학교 가면 냄새난다 하니까” 일본 학교를 다녔던 동포 2세 3세들의 증언이다.
그래도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들이 단결하여 후손들에게는 그런 고통의 시간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투쟁하며 그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견디며 떨쳐 나온 70여년의 역사는 참으로 피눈물 나는 세월이었다.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로 90년대까지 전철 정기 통학권을 구입할 수 없었으며 일본의 공식 체육대회에도 나가지 못했다. 2002년 북일정상화 교섭 이후 제기된 ‘납치문제’ 이후 조선학교 여학생 교복인 검정 치마 흰 저고리에 칼질을 하는 사태도 벌어졌고, 협박전화,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 등 조선학교에 대한 험악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치마저고리는 교내에서만 입고 있다.
조선학교는 일본의 학교교육법 규정상 ‘각종학교’로 분류되어 있다. ‘각종학교’란 직업전문학교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것 같다. 하여튼 정규학교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국비 지원에서 소외되고 지방자치단체의 소액 재정지원 밖에 받을 수 없다. 지금은 지자체의 보조금도 일부 또는 전액 삭감된 상태이다. 또한 고급부를 졸업하고도 일본대학으로 진학하려면 또 다른 자격을 갖추어야만 한다.
최근 자주 화제가 되고 있는 ‘고교무상화’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목적으로 외국인학교 포함, 일본의 고급학교에 다니는 학생 1명당 연간 12만~24만 엔(약 120만~240만 원)을 지원하기로 한 제도이다. 하지만 2013년 2월 아베정권은 조선학교 고급부만 제외했는데 그 이유가 ‘조선학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조총련)의 부당한 지배에 있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지원하면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갈지 의심스럽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다. 지원하고 만일 그들이 걱정하듯 잘 못 흘러가면 그때 조치하면 될 일 아닌가? 이에 조선고급학교 10개교 중 오사카·아이치·히로시마·후쿠오카·도쿄의 조선학원과 학생들이 무상화제도 배제 취소 소송과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현재는 최고심에서도 5곳 모두 패소하여 사법적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상태이다(오사카 1심에서는 유일하게 승소하였다). 사법부의 판단은 모두 끝났지만 사회적인 투쟁으로서의 고교무상화 싸움은 여전히 계속 이어가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 
또한 2019년 10월 1일부터 3~5세 모든 어린이들에게 보육비를 지원할 목적으로 시행된 ‘유아교육 보육무상화’ 제도에서는 외국인 학교를 모두 배제했는데 외국인학교 유치부의 절반가량이 조선학교유치부(40곳)이다. 이 유보무상화의 재원은 소비세의 일부를 사용하는데, 재일조선인들은 세금은 꼬박꼬박 내면서 혜택은 받지 못하는 셈이다.
고교무상화 배제와 유보무상화 배제에 대해,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등 여러 기구도 일본 정부의 조선학교 차별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2014년에 이어 2018년에도 ‘일본 정부는 학생들에 차별 없는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며 조선학교의 고교무상화 배제 정책 시정을 권고한 바 있으나 일본 정부는 미동도 없다.
후쿠오카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한 지역을 소개해주시던 80대 2세 어르신 한 분의 “재일조선인들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소! 조국에 가서 이 말을 꼭 전해주시오!”라시던 목청 높인 말씀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가장 괴롭히는 사람도 일본인이고,
 가장 고마운 사람도 일본인

일본에서의 차별과 멸시 탄압을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조선학교를 이해하고 돕는 일본인들도 많이 있다. 다섯 곳에서 벌어진 고교무상화 재판에서 지역마다 60~70인의 변호인단 거의 대부분이 일본 변호인이었다. 거의 무상으로 조선학교를 위해 소매 걷고 달려와 도와준 일본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조선학교 무상화를 위한 연락회’를 만들어 물심양면으로 조선학교와 교류하며 돕고 있다.
일본의 보수정권과 재특회(재일조선인의 특권을 반대하는 모임)와 같은 극우 단체들의 노골적인 인종차별 발언과 욕설을 퍼붓는 괴롭힘이 있지만, 일본 문부과학성 앞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집회에 재일조선인만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참여 또한 적지 않다.
이런 일본 내의 양심이 살아있는 한 조선학교의 투쟁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이처럼 어렵고 힘든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이어가기 위한 동포들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다. 그 세월이 7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데 부끄럽게도 그동안 우리는 동포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뜻있는 단체들의 조선학교 방문을 시작으로 그들과 교류한 것이 불과 십 수 년 전의 일이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함께하는 활동들이 필요하다.
재일동포들의 고향이 대부분 경상도이고 한 많은 현해탄을 건너간 곳이 부산이었다. 아마 그들이 귀국한다면 조국 땅을 처음으로 밟을 곳도 부산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부산은 남다른 마음으로 조선학교를 바라보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들을 모아서 부산의 2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동참하여 2018년 12월 1일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출범하였다.
출범 후 3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꽤 바쁘게 활동을 이어왔다.
2019년에는 큐슈지역을 중심으로 조선학교를 방문하여 교류 행사를 여러 차례 가졌다. 교류뿐만 아니라 고급학교 무상화 배제 철회를 위한 집회와 재판에도 함께 했다.
부산을 찾은 교포 2세 어르신들(대부분 80세 전후), 재일동포 예술인들과 함께 부산시의회 의장, 부산시교육감, 부산시장을 만나 지자체 차원에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해보기도 하였다.
‘조선학교’를 잘 모르는 시민들을 상대로 ‘조선학교’를 알리는 영화상영, 거리 홍보, 예술인들이 함께 한 거리문화제도 열었다.
2019년 2월 9일에는 큐슈 고쿠라 국제회의장(600석)을 가득 채워 ‘함께 해요 조선학교, 콘서트’가 열렸다. 조선학교 학생들과 후쿠오카 조선 가무단, 일본의 북 공연팀, 그리고 부산의 예술인들이 같이 무대에 올라 공연하였는데 이런 합동 공연은 해방 이후 처음이었다. 부산에서 오신 분들은 학생들의 공연에, 재일동포들은 고국 예술인의 공연에 눈물 흘렸다. 마지막의 ‘통일열차’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는 장관이기도 했다.
그리고 8월 9일에는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함께해요 콘서트 통(統), 일(一)’을 열어 2월 9일 고쿠라의 감동을 부산에서도 다시 한번 질펀하게 펼쳤다.
코로나19로 서로 왕래하며 교류하는 사업들은 거의 하지 못했으나 2020년 상반기에는 당시 일본에서는 마스크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몇 달간 시민들과 함께 마스크를 모아 4,000장 정도를 큐슈지역의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부산시교육청과 연계하여 해마다 1,000여권의 도서를 여러 곳의 조선학교에 보냈고, 어린이도서연구회의 후원으로 그림책을 초급부 유치부 여러 곳에 보내고 있고, 소조활동에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하여 보내기도 했다.

앞으로도 가능한 범위에서 같이 손잡고 가려 한다. 그리고 아직도 ‘조선학교’가 생소한 시민들에게 조선학교의 역사와 실상을 알리는 상시적인 활동과 시민강좌 등도 펼치려 한다.
우리의 활동 이전에 무엇보다 그 어려운 세월을 살아온 동포들을 이해하고 안아주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여긴다. 어느 동포분이 하신 이야기 ‘미안하다, 안타깝다, 힘들겠다, 어려운데 어떻게 하냐’보다는 아이들이 ‘부산에도 고향에도 우리를 지지하고 예뻐하는 이모 삼촌들 많다’라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봄은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가려 한다. 조직을 여물게 하는 노력도 함께 하면서. 관심있는 많은 분들의 동참을 기대한다.

남도 알고 북도 알고 일본도 안다

세상에서 통일을 가장 염원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남북정상회담을 전교생이 수업 전폐하고 생중계를 보면서 눈물 흘리며 환호한 사람들. 통일이 되어야 일본에서의 삶이 비로소 당당해진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 한반도의 분단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바로 재일조선인이라 생각한다.
언제고 평화의 시대가 오면, 남도 알고 북도 알고 일본도 아는 조선학교야 말로 큰 역할을 담당하리라 믿는다. 
갖은 차별과 억압 속에서도, 적지 않은 학비를 감당하면서도, 조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하는 말 “나를 나로 살게 해주는 학교” 참으로 소중한 우리학교이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를 만든 김철민 감독의 이야기를 일부 옮기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 · · · ·(중략)· · · · ·   영화를 본 관객들이 항상 하는 질문이 ‘우리가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 차별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였습니다.
통일이 삶과 운명 그 자체인 사람들, 76년이 넘도록 혹독한 차별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우리가 힘이 되어 드리고 싶지만 분단과 국가보안법이 가로막고 있어 어렵게만 생각 되었습니다. 분단을 핑계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구나. 관객들에게 배웠습니다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민족의 이익과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10.4 남북공동선언 제8항)’ 남북정상의 약속처럼 남북이 함께 일본사회의 재일조선인 차별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재일동포들에게도 힘이 되고, 막혀있는 남북관계를 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자료
배지원·조경희,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 도서출판 선인, 2017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꽃송이/우리는 조선학교 학생입니다』 2019, 너머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조선학교에 대한 열네 가지 궁금증』 2021
고찬유 감독, 다큐멘터리 『아이들의 학교』 
김지운·김도희 감독, 다큐멘터리 『차별』
김철민 감독, 다큐멘터리 『나는 조선사람입니다』